* 이 글은 클리앙 ( clien.net ) 의 “모두의공원” 게시판에도 게재하였습니다.

——

아까 오전에 글 하나 ( https://www.clien.net/service/board/park/15409301 ) 를 보다가 생각난 것이 있어 한번 써봅니다.

저는 영도에서 25년 정도 살았습니다. 영도에서 태어났고 학창시절을 보냈습니다. 대학도 부산대에 입학하면서 통학을했고, 군 복무마저 영도에서 공익근무를 했으니 나름대로 오래 살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아까 뉴스를 보니 영도가 노령층 주민들에게서 만족도가 매우 높다고 하더군요. 그럴만 합니다. 제가 기억하는 어린시절 영도는 조선소와 시장의 이미지가 강합니다. 지금의 노령층, 당시 가장들은 대다수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와 주변조선소, 기계공작소 등에서 청춘을 다 바쳤고, 그 가장들이 일을 하러간 사이 어머니들은 시장에서 저녁 찬거리를 마련하거나 물건을 파시는게 아주 평범한 일상이었습니다. 아 선원도 심심찮게 있었네요. 이 산업적 기반은 생각보다 탄탄해서 전쟁후 아무것도 가진것 없던 사람들에게 외벌이로도 아이 둘 낳고 작은 아파트 한채는 마련할 수 있게끔 해줬습니다. 그들에게 영도는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가지고 싶은걸 넉넉히 가질 수 있었던 행복했던 추억을 간직한 곳이죠.

하지만 저같은 젊은 영도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아버지들이 은퇴가 다가오는 시점, 다시말해 젊은이들이 부모님을 부양해야 하는 시점부터 조금씩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기 시작한 겁니다. 바로 산업재해입니다. 만성적인 근골격계 질환은 물론이거니와, 쇳소리로 인한 청력 문제, 용접 불빛으로 인한 눈 문제, 석면으로 인한 암, 호흡기문제 등 다양한 문제들이 소리소문없이 퍼져있었습니다. 당시는 산업재해라는 개념이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까요.

그리고 저 역시도 아버지를 조선소에서 잃었습니다. 제 아버지는 중학생때부터 대한조선공사 견습생으로 들어가 자리잡고 집안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남긴 병원비에 남은 가족들도 쓰러질뻔 했습니다. 영도가 저희를 먹여살렸지만 영도가 저희를 죽이려고도 한 셈이죠.

국가의 대응은 늦어도 너무 늦었습니다. 그나마 지난 2017년 영도에 대규모 석면피해지역 주민건강영향조사가 있었는데 그 시점이 1952년부터 였습니다. 세월이 세월인지라 알게 모르게 피해를 입고 돌아가신분들이 이미 상당해 통계에 잡힐 수가 없는데 큰 의미가있을까요.

아무튼 가까스로 가족을 추스리고 제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영도를 떠나는 것, 아니 영도로부터 도망치는 것이었습니다. 영도사람들은 압니다. 영도할매 전설을요. 하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날수 있었습니다. 저희 영도 젊은이들에게, 부모님세대의 “찬란한” 영도의 실상은 그들의 수명을 갉아먹으면서 유지해온 것이라는걸 알기 때문입니다. 그 두려움에 더이상 땅을 밟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 영도의 노령층들이 영도를 잘 나가지 않는 이유도 자신들이 그 땅에 바친 피를 잊지 못한게 아닐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도 부산에 살고 있지만 영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모 구에 살고 있습니다. 영도를 떠나온지 10년도 더 넘었지만 다시 영도를 찾은 적은 세 손가락에 꼽을 정도 같네요. 아마 앞으로도 특별한 일이 없다면 가지 않을 듯 합니다. 이래저래 애증의 장소네요.

심심해서 끄적여 봤습니다. 재미없는 개인적인 이야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